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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함어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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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5-12-13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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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에서 열린 나눔과 책임 콘서트 '열린도시 대구, 역사 이해 몇가지' 특강에 주말에도 불구하고, 빈좌석 없이 빼곡하게 대구시민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최미화 기자
대구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지난 2023년 대구경북광역행정통합이 한창 이슈가 되면서 경상북도 군위군은 대구시 군위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인해 대구시는 면적이 1천494만7천㎢(2022년 771만2천600㎢)로 전국 3번째로 넓어졌고, 특광역시 가운데서는 가장 넓은 크기와 9개 구군을 가진 '더 큰 대구'가 되었다.
최근 대구에서는 손오공릴게임예시 '더 큰 대구'에 맞추어서 대구에 덧씌워진 왜곡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역사가 입증한 선공후사의 열린 대구정신을 새로운 대구 정체성으로 자리잡도록 해야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6일 오후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상임대표 이명식 전 대구대박물관장, 명예교수)가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에서 연 나눔과 책임콘서트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력하게 제기됐다. 카카오야마토
이날 신형석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박물관운영본부장은 역사적 사료 중심으로 △대구 폐쇄적 분지인가 △판관 이서는 신천 물줄기를 돌렸나 △근대골목만 대구의 대표 문화관광상품인가 △광복회 운동의 본산 대구 △국채보상운동 발의 공간 제자리찾기 등 몇가지 이슈를 대구시민사회를 향해 던져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릴짱
신형석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박물관운영본부장이 군위군 대구편입으로 더 커진 대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몇가지 화두를 던졌다. 최미화 기자
◆대구는 폐쇄적인 분지?
대구가 분지로 본격 거론되기 시작 황금성게임랜드 한 것은 채 백년이 되지 않는다. '대구분지론'을 처음 꺼낸 사람은 1933년 일제 시대 대구공립여자고보(현 경북여고 전신) 교사 다무라 가즈히사다. 이후 1940년에 타다 후미오 동경제국대 지리학과 교수가 『대구부사』를 집필하면서 대구를 분지로 공식서술했고 이런 주장들은 별 반론없이 그대로 교과서에 반영되었다.
하 릴짱릴게임 지만 대구는 남북에 산지가 발달해 있지만 동서로는 금호강이 흐르면서 평야가 잘 발달해있다. "산지가 국토의 약 70%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대구를 분지라 하면 내륙의 다른 도시들도 다 분지라 불러야하지만, 유독 대구만 분지가 강조되면서 마치 분지에 갇혀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기질이 강하다는 편견이 부정적 도시 이미지로 연결되고 있다"는 신형석 본부장은 "최근 지리학계에서는 도시를 둘러싼 산의 고도가 300m 미만이면 분지로 판단하지 않는 경우도 생겨 나고 있다"면서 '대구 분지론'은 논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파생된 그릇된 이미지도 동의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군위군이 편입된 이후 대구시의 네이버 위성지도. 특광역시 가운데 가장 넓고, 동서로 금호강이, 도심에는 신천이 흐르고 있다.
대구는 남북으로는 팔공산과 비슬산 최정산 등 높은 산이, 동서로는 금호강이 사방산 인근에서 합쳐지면서 낙동강과 만나 부근에 평야가 잘 발달했다. "지난 2023년에 군위군이 대구에 편입되면서 더 커진 대구에 맞는 새로운 대구 이미지 창출과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는 신 본부장은 이미지 개선은 도시 발전과 연계되면서 시민 자긍심과 연계되니 이를 다룰 대구시립종합박물관이 건립돼야하는 것은 물론, 잘못된 인식들도 바로잡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박물관운영본부는 최근 소속 3개 박물관(대구근대역사관, 대구방짜유기박물관, 대구향토역사관)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공립박물관으로 인증받아 향후 역할이 주목되고 있다.
◆댓가없는 헌납, 달성토성 기부
감꽃잎 모양의 토성인 대구 달성은 고대 달구벌국 지배세력이 거주한 곳으로 둘레에 1.3km 성벽이 축성되어 있는 달성서씨 세거지였다.
조선 세종 때 필요에 따라 국가 귀속을 요구하자 구계 서침은 조건없이 헌납하였다. 나라에서 '대토' 등 보상책을 제시하였으나 단 한가지 대구사람들의 환곡 이자를 낮춰달라고 요청하였을 뿐이다. 이는 『대구읍지』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열린 대구정신의 표본이다.
선조 29년(1596년), 임진왜란 중에 경상감영이 일시적으로 대구 달성에 설치되었고, 성벽을 석축으로 보강했다. 1599년에는 달성에 향교를 건립하였고, 옛 향교터에 서침 나무가 서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경상감영의 출입문이던 관풍루가 현재 대구 달성공원 오른쪽 위에 자리잡고 있다.
구계 서침의 달성 기부는 대구사람의 선공후사 정신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사례 중의 하나이다. 사가들이나 화가들은 이런 대구 달성을 산수화에 담았다. 하양현감을 지낸 겸재 정선이 「달성원조도」(達城遠眺圖)를 그렸고, 겸재의 손자 손암 정황도 「대구달성도」(영남대박물관 소장)를 그렸다. 지금 현재 국립대구박물관 2층에서 전시(2025 국립대구박물관 특별전 「사람과 땅 지리지에 담다」, 2026년 2월22일까지) 되고 있는 이 손암의 「대구달성」에는 대구읍성까지 그려져있다. 겸재의 「달성원조도」에는 대구읍성이 그려져 있지 않다. 대구읍성은 1736년에 축성되었다. 손암의 「대구달성도」는 평상시 실물을 접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을때 직접 관람하는 것도 대구역사와 정신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간송미술관에도 「대구달성」을 그린 산수화가 있다.
국립대구박물관이 열고 있는 '사람과 땅 지리지에 담다' 특별전 포스터. 이 전시회에 대구 달성을 그린 겸재 정선의 손자 손암 정황의 '대구달성도'가 전시되고 있다. 대구읍성이 그려져 있는 '대구달성도'는 영남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품이다. 국립대구박물관 다운로드.
◆이서는 신천 물길을 돌린게 아니라 자비로 제방을 수리했다.
아직까지도 대구 신천의 물길을 판관 이서가 돌렸다고 잘못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팩트체크를 하자면 아니다. 이서는 신천 일부 제방을 개인돈으로 수리한 공로가 있다. 덕수이씨인 이서(1728~1794)가 대구판관으로 부임하여 1778년 7월까지 근무했다. 그런데 이보다 10년 전에 간행된 『대구읍지』(1768년)에 이미 "신천(新川)은 부 동쪽 4리에 있다. 한 근원은 팔조령에서 나오고, 한 근원은 최정산에서 나와 사방산 앞에서 합류하여 금호강으로 들어간다"고 적혀있다. 물길을 돌린게 아니라 사비를 들여 제방을 지어 대구신천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럼 왜 대구에는 판관 이서의 비석이 2개나 들어서 있을까?
이서는 이 신천 제방을 세금을 들여서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들여서 수리함으로써 대구의 물난리 문제를 해결했다. 대구읍민들이 '이공제비'(李公堤碑)를 1797년(정조 21)에 세우고 기념하는 이유다. 이공제비는 본래 수성교 근처에 있었으나 상동교 근처로 옮겨져서 이서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서공원에는 이공제비 2기와 군수 이범선 불망비가 있다. 이범선 대구군수 역시 광무2년(1898년)에 큰 홍수로 신천 제방 일부가 손실되자 읍민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제방을 보수했다. 이를 기려서 1899년에 비석을 세웠고, 매년 2월 대구 수성문화원이 향사를 지내고 있다.
◆대구영시 화재 의연비
1899년(광무 3) 대구 영시(令市, 약령시)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관아 부속건물, 상업시설, 민가 등이 큰 피해를 보자 의연금 모금운동이 펼쳐졌다. 대구읍민들이 나서서 영시 이재민을 도운 사실을 '대구영시 화재 의연비'는 적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화재 의연비를 냈길래, 이 의연비에는 40냥 이하 의연자의 이름과 액수는 모두 쓸 수가 없다고 적혀있다. 모두가 재난극복에 한마음으로 동참한 것이다.
1899년 12월2일 대구 영시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자, 1899년 12월 중하순부터 의연금 모금운동을 시작하여 1900년 4,5월경 이재민 구휼 및 사용 내역을 정산했고, 1900년 6월 비석을 제작했다고 적혀있다. 의연금에는 지역 지도자인 경상북도관찰사가 1천냥을 기부했음을 밝히고 있고, 의연금은 총 5천486냥으로 이중 4천539냥7전5푼은 불에 탄 화물의 가격으로 나누어 구휼하였고, 900냥은 불에 탄 민간에 배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겨울 화마로 영시의 생업터와 집을 잃은 화재 이재민들을 향해 대구읍민들이 들불처럼 구호에 동참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구영시 화재 의연비는 대구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고, 대구근대역사관 1층 상설전시관에 있다. 1백여년 전에 불타올랐던 대구시민정신은 오늘날 대구근대역사관에서 기부저금통 만들기로 이어지고 있다. 학생들은 나만의 기부저금통을 만들어서 대구시민주간에 기부하고 있다. 기부하고 배려하는 습성을 어릴 때부터 몸으로 익히고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어느 기관에서 평생교육을 하든 일정시간(20시간)이 넘어가면 지역학을 반드시 1~2시간씩 하도록 하고 있다.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시민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국채보상운동 발상지 대구
1907년 1월29일 대구 광문사 문회에서 서상돈은 국채 1천300만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다. 그 직후인 2월21일(이날이 대구시민의 날이다)과 24일 대구군민대회를 북후정(옛 서문시장 북쪽 끝) 앞에서 개최하고,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이 국채보상운동에는 남성 뿐 아니라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와 같은 가정주부들은 물론 당시 경제력이 있었던 기생 앵무 등 전 계층과 모든 연령층이 전방위적으로 참여했다.
이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고, 구 시립중앙도서관 1, 2층을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근거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 발의장소 고증에는 아직까지 오류가 있다.
"국채보상운동 발의 장소인 광문사는 옛 경상감영 관아 '취고수청'(현 국채보상로, 구 한우장설렁탕 가게 앞)이다. 대구수창초등학교 옆에 설치한 기념공간은 위치선정이 잘못되어 수정해야한다"는 신 본부장은 "군민대회가 열린 북후정도 시장북로에 위치하였다"며 현 대구콘서트하우스 앞에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물 위치선정은 잘못된 것이니 빨리 옮겨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구서문시장이 1923년 천왕당지를 매립하여 시장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고, 1919년 3월8일에 열린 대구 3.1만세운동은 옛 서문시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린 도시 대구가 만든 무장독립운동
1910년대 무장독립운동을 이끈 광복회는 서울도 부산도 아닌 대구에 활동 중심지를 두었다. 1915년 8월25일(음력 7월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가 결성되었고, 총사령은 울산 송정 출신으로 경주에서 거주하던 박상진이었다.
대구 달성공원은 부지 전체가 사적지다. 달성공원 안에 관풍루, 대구향토역사관, 동물원, 달성서씨 유허비 등이 있다. 출처 대구시 영상자료
이 광복회는 1912년 대구 본정(서문로) 대구경찰서 앞에 상덕태상회를 과감하게 설치하면서 독립운동 거점이자 광복회 본부로 사용했다. 말하자면 상덕태상회가 대구경찰서와 경북경찰부를 감시한 셈이다.
그만큼 허를 찌르면서 효능적으로 활동한 광복회는 조선팔도 및 만주에 지부를 설치한 전국적인 조직으로 비밀결사,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거부이던 박상진은 이 광복회 활동에 모든 자산을 다 바쳤다. 그 여파로 박상진의 후손들은 궁핍하게 살고 있다. 박상진 광복회 총사령의 후손들을 나라는 물론 대구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보살피는 운동을 펼쳐야한다.
대구근대역사관은 1910년대 광복을 꿈꾼 청년들 특별기획전 '대구에서 만나자'를 기획, 대구시민사회에 큰 반향을 울렸다. 이 기획은 한국박물관협회 2024년 전국박물관 기획전시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대구 달성공원. 출처 대구시 영상자료
◆대구 도심 관광을 근대골목투어로 부르는게 맞을까
이미 청동기 문화까지 있는 것으로 밝혀진 대구의 도심관광을 근대기에 초점을 맞춘 근대골목, 근대골목투어로 부르는 것은 괜찮을까? 대구도심에서는 청동기시대 대구, 고대 달구벌국, 조선시대 71개 고을을 통괄한 경상감영, 식민지 시기 광복회 활동무대, 이육사 활동무대, 복심법원이 있던 대구의 상급법원과 감옥(형무소), 근대섬유 개화지, 조선시대에서 근대까지 학교, 상공업, 의료가 꽃핀 곳, 경북도청과 피난수도 등 통시대적으로 얽혀있다. 지나치게 근대기에만 머물지 말고, 시대를 확산하여 더 다양한 주제로 문화관광콘텐츠를 개발하고 알려야한다.
대구를 경상도의 중심도시라는 위상 속에서 그 역사와 도시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다양한 시도와 활발한 문화콘텐츠 발굴이 절실하다. 그런 활동들의 전개 속에서 대구의 정체성에 맞지않게 덧씌워지거나 왜곡된 이미지, 부정적 선입견을 벗어나려는 노력도 배가돼야한다.
지난 6일 오후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에서 열린 2025 나눔과 책임콘서트에서 리뎀션 코러스가 합창을 들려주었다. 맨 앞쪽은 제상철 리뎀션 코러스 지휘자. 최미화 기자
한편 이날 나눔과 책임 콘서트 2부에서는 리뎀션 코러스(지휘자 제상철)의 콘서트가 진행되었다. 리뎀션 코러스는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소속으로 지난 2018년 창단됐으며, 리뎀션은 '되찾음' '해방' '구원' 등을 뜻을 갖고 있다.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기자 admin@slotnara.info
대구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지난 2023년 대구경북광역행정통합이 한창 이슈가 되면서 경상북도 군위군은 대구시 군위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인해 대구시는 면적이 1천494만7천㎢(2022년 771만2천600㎢)로 전국 3번째로 넓어졌고, 특광역시 가운데서는 가장 넓은 크기와 9개 구군을 가진 '더 큰 대구'가 되었다.
최근 대구에서는 손오공릴게임예시 '더 큰 대구'에 맞추어서 대구에 덧씌워진 왜곡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역사가 입증한 선공후사의 열린 대구정신을 새로운 대구 정체성으로 자리잡도록 해야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6일 오후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상임대표 이명식 전 대구대박물관장, 명예교수)가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에서 연 나눔과 책임콘서트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력하게 제기됐다. 카카오야마토
이날 신형석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박물관운영본부장은 역사적 사료 중심으로 △대구 폐쇄적 분지인가 △판관 이서는 신천 물줄기를 돌렸나 △근대골목만 대구의 대표 문화관광상품인가 △광복회 운동의 본산 대구 △국채보상운동 발의 공간 제자리찾기 등 몇가지 이슈를 대구시민사회를 향해 던져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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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석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박물관운영본부장이 군위군 대구편입으로 더 커진 대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몇가지 화두를 던졌다. 최미화 기자
◆대구는 폐쇄적인 분지?
대구가 분지로 본격 거론되기 시작 황금성게임랜드 한 것은 채 백년이 되지 않는다. '대구분지론'을 처음 꺼낸 사람은 1933년 일제 시대 대구공립여자고보(현 경북여고 전신) 교사 다무라 가즈히사다. 이후 1940년에 타다 후미오 동경제국대 지리학과 교수가 『대구부사』를 집필하면서 대구를 분지로 공식서술했고 이런 주장들은 별 반론없이 그대로 교과서에 반영되었다.
하 릴짱릴게임 지만 대구는 남북에 산지가 발달해 있지만 동서로는 금호강이 흐르면서 평야가 잘 발달해있다. "산지가 국토의 약 70%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대구를 분지라 하면 내륙의 다른 도시들도 다 분지라 불러야하지만, 유독 대구만 분지가 강조되면서 마치 분지에 갇혀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기질이 강하다는 편견이 부정적 도시 이미지로 연결되고 있다"는 신형석 본부장은 "최근 지리학계에서는 도시를 둘러싼 산의 고도가 300m 미만이면 분지로 판단하지 않는 경우도 생겨 나고 있다"면서 '대구 분지론'은 논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파생된 그릇된 이미지도 동의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군위군이 편입된 이후 대구시의 네이버 위성지도. 특광역시 가운데 가장 넓고, 동서로 금호강이, 도심에는 신천이 흐르고 있다.
대구는 남북으로는 팔공산과 비슬산 최정산 등 높은 산이, 동서로는 금호강이 사방산 인근에서 합쳐지면서 낙동강과 만나 부근에 평야가 잘 발달했다. "지난 2023년에 군위군이 대구에 편입되면서 더 커진 대구에 맞는 새로운 대구 이미지 창출과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는 신 본부장은 이미지 개선은 도시 발전과 연계되면서 시민 자긍심과 연계되니 이를 다룰 대구시립종합박물관이 건립돼야하는 것은 물론, 잘못된 인식들도 바로잡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박물관운영본부는 최근 소속 3개 박물관(대구근대역사관, 대구방짜유기박물관, 대구향토역사관)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공립박물관으로 인증받아 향후 역할이 주목되고 있다.
◆댓가없는 헌납, 달성토성 기부
감꽃잎 모양의 토성인 대구 달성은 고대 달구벌국 지배세력이 거주한 곳으로 둘레에 1.3km 성벽이 축성되어 있는 달성서씨 세거지였다.
조선 세종 때 필요에 따라 국가 귀속을 요구하자 구계 서침은 조건없이 헌납하였다. 나라에서 '대토' 등 보상책을 제시하였으나 단 한가지 대구사람들의 환곡 이자를 낮춰달라고 요청하였을 뿐이다. 이는 『대구읍지』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열린 대구정신의 표본이다.
선조 29년(1596년), 임진왜란 중에 경상감영이 일시적으로 대구 달성에 설치되었고, 성벽을 석축으로 보강했다. 1599년에는 달성에 향교를 건립하였고, 옛 향교터에 서침 나무가 서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경상감영의 출입문이던 관풍루가 현재 대구 달성공원 오른쪽 위에 자리잡고 있다.
구계 서침의 달성 기부는 대구사람의 선공후사 정신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사례 중의 하나이다. 사가들이나 화가들은 이런 대구 달성을 산수화에 담았다. 하양현감을 지낸 겸재 정선이 「달성원조도」(達城遠眺圖)를 그렸고, 겸재의 손자 손암 정황도 「대구달성도」(영남대박물관 소장)를 그렸다. 지금 현재 국립대구박물관 2층에서 전시(2025 국립대구박물관 특별전 「사람과 땅 지리지에 담다」, 2026년 2월22일까지) 되고 있는 이 손암의 「대구달성」에는 대구읍성까지 그려져있다. 겸재의 「달성원조도」에는 대구읍성이 그려져 있지 않다. 대구읍성은 1736년에 축성되었다. 손암의 「대구달성도」는 평상시 실물을 접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을때 직접 관람하는 것도 대구역사와 정신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간송미술관에도 「대구달성」을 그린 산수화가 있다.
국립대구박물관이 열고 있는 '사람과 땅 지리지에 담다' 특별전 포스터. 이 전시회에 대구 달성을 그린 겸재 정선의 손자 손암 정황의 '대구달성도'가 전시되고 있다. 대구읍성이 그려져 있는 '대구달성도'는 영남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품이다. 국립대구박물관 다운로드.
◆이서는 신천 물길을 돌린게 아니라 자비로 제방을 수리했다.
아직까지도 대구 신천의 물길을 판관 이서가 돌렸다고 잘못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팩트체크를 하자면 아니다. 이서는 신천 일부 제방을 개인돈으로 수리한 공로가 있다. 덕수이씨인 이서(1728~1794)가 대구판관으로 부임하여 1778년 7월까지 근무했다. 그런데 이보다 10년 전에 간행된 『대구읍지』(1768년)에 이미 "신천(新川)은 부 동쪽 4리에 있다. 한 근원은 팔조령에서 나오고, 한 근원은 최정산에서 나와 사방산 앞에서 합류하여 금호강으로 들어간다"고 적혀있다. 물길을 돌린게 아니라 사비를 들여 제방을 지어 대구신천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럼 왜 대구에는 판관 이서의 비석이 2개나 들어서 있을까?
이서는 이 신천 제방을 세금을 들여서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들여서 수리함으로써 대구의 물난리 문제를 해결했다. 대구읍민들이 '이공제비'(李公堤碑)를 1797년(정조 21)에 세우고 기념하는 이유다. 이공제비는 본래 수성교 근처에 있었으나 상동교 근처로 옮겨져서 이서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서공원에는 이공제비 2기와 군수 이범선 불망비가 있다. 이범선 대구군수 역시 광무2년(1898년)에 큰 홍수로 신천 제방 일부가 손실되자 읍민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제방을 보수했다. 이를 기려서 1899년에 비석을 세웠고, 매년 2월 대구 수성문화원이 향사를 지내고 있다.
◆대구영시 화재 의연비
1899년(광무 3) 대구 영시(令市, 약령시)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관아 부속건물, 상업시설, 민가 등이 큰 피해를 보자 의연금 모금운동이 펼쳐졌다. 대구읍민들이 나서서 영시 이재민을 도운 사실을 '대구영시 화재 의연비'는 적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화재 의연비를 냈길래, 이 의연비에는 40냥 이하 의연자의 이름과 액수는 모두 쓸 수가 없다고 적혀있다. 모두가 재난극복에 한마음으로 동참한 것이다.
1899년 12월2일 대구 영시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자, 1899년 12월 중하순부터 의연금 모금운동을 시작하여 1900년 4,5월경 이재민 구휼 및 사용 내역을 정산했고, 1900년 6월 비석을 제작했다고 적혀있다. 의연금에는 지역 지도자인 경상북도관찰사가 1천냥을 기부했음을 밝히고 있고, 의연금은 총 5천486냥으로 이중 4천539냥7전5푼은 불에 탄 화물의 가격으로 나누어 구휼하였고, 900냥은 불에 탄 민간에 배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겨울 화마로 영시의 생업터와 집을 잃은 화재 이재민들을 향해 대구읍민들이 들불처럼 구호에 동참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구영시 화재 의연비는 대구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고, 대구근대역사관 1층 상설전시관에 있다. 1백여년 전에 불타올랐던 대구시민정신은 오늘날 대구근대역사관에서 기부저금통 만들기로 이어지고 있다. 학생들은 나만의 기부저금통을 만들어서 대구시민주간에 기부하고 있다. 기부하고 배려하는 습성을 어릴 때부터 몸으로 익히고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어느 기관에서 평생교육을 하든 일정시간(20시간)이 넘어가면 지역학을 반드시 1~2시간씩 하도록 하고 있다.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시민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국채보상운동 발상지 대구
1907년 1월29일 대구 광문사 문회에서 서상돈은 국채 1천300만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다. 그 직후인 2월21일(이날이 대구시민의 날이다)과 24일 대구군민대회를 북후정(옛 서문시장 북쪽 끝) 앞에서 개최하고,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이 국채보상운동에는 남성 뿐 아니라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와 같은 가정주부들은 물론 당시 경제력이 있었던 기생 앵무 등 전 계층과 모든 연령층이 전방위적으로 참여했다.
이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고, 구 시립중앙도서관 1, 2층을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근거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 발의장소 고증에는 아직까지 오류가 있다.
"국채보상운동 발의 장소인 광문사는 옛 경상감영 관아 '취고수청'(현 국채보상로, 구 한우장설렁탕 가게 앞)이다. 대구수창초등학교 옆에 설치한 기념공간은 위치선정이 잘못되어 수정해야한다"는 신 본부장은 "군민대회가 열린 북후정도 시장북로에 위치하였다"며 현 대구콘서트하우스 앞에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물 위치선정은 잘못된 것이니 빨리 옮겨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구서문시장이 1923년 천왕당지를 매립하여 시장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고, 1919년 3월8일에 열린 대구 3.1만세운동은 옛 서문시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린 도시 대구가 만든 무장독립운동
1910년대 무장독립운동을 이끈 광복회는 서울도 부산도 아닌 대구에 활동 중심지를 두었다. 1915년 8월25일(음력 7월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가 결성되었고, 총사령은 울산 송정 출신으로 경주에서 거주하던 박상진이었다.
대구 달성공원은 부지 전체가 사적지다. 달성공원 안에 관풍루, 대구향토역사관, 동물원, 달성서씨 유허비 등이 있다. 출처 대구시 영상자료
이 광복회는 1912년 대구 본정(서문로) 대구경찰서 앞에 상덕태상회를 과감하게 설치하면서 독립운동 거점이자 광복회 본부로 사용했다. 말하자면 상덕태상회가 대구경찰서와 경북경찰부를 감시한 셈이다.
그만큼 허를 찌르면서 효능적으로 활동한 광복회는 조선팔도 및 만주에 지부를 설치한 전국적인 조직으로 비밀결사,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거부이던 박상진은 이 광복회 활동에 모든 자산을 다 바쳤다. 그 여파로 박상진의 후손들은 궁핍하게 살고 있다. 박상진 광복회 총사령의 후손들을 나라는 물론 대구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보살피는 운동을 펼쳐야한다.
대구근대역사관은 1910년대 광복을 꿈꾼 청년들 특별기획전 '대구에서 만나자'를 기획, 대구시민사회에 큰 반향을 울렸다. 이 기획은 한국박물관협회 2024년 전국박물관 기획전시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대구 달성공원. 출처 대구시 영상자료
◆대구 도심 관광을 근대골목투어로 부르는게 맞을까
이미 청동기 문화까지 있는 것으로 밝혀진 대구의 도심관광을 근대기에 초점을 맞춘 근대골목, 근대골목투어로 부르는 것은 괜찮을까? 대구도심에서는 청동기시대 대구, 고대 달구벌국, 조선시대 71개 고을을 통괄한 경상감영, 식민지 시기 광복회 활동무대, 이육사 활동무대, 복심법원이 있던 대구의 상급법원과 감옥(형무소), 근대섬유 개화지, 조선시대에서 근대까지 학교, 상공업, 의료가 꽃핀 곳, 경북도청과 피난수도 등 통시대적으로 얽혀있다. 지나치게 근대기에만 머물지 말고, 시대를 확산하여 더 다양한 주제로 문화관광콘텐츠를 개발하고 알려야한다.
대구를 경상도의 중심도시라는 위상 속에서 그 역사와 도시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다양한 시도와 활발한 문화콘텐츠 발굴이 절실하다. 그런 활동들의 전개 속에서 대구의 정체성에 맞지않게 덧씌워지거나 왜곡된 이미지, 부정적 선입견을 벗어나려는 노력도 배가돼야한다.
지난 6일 오후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에서 열린 2025 나눔과 책임콘서트에서 리뎀션 코러스가 합창을 들려주었다. 맨 앞쪽은 제상철 리뎀션 코러스 지휘자. 최미화 기자
한편 이날 나눔과 책임 콘서트 2부에서는 리뎀션 코러스(지휘자 제상철)의 콘서트가 진행되었다. 리뎀션 코러스는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소속으로 지난 2018년 창단됐으며, 리뎀션은 '되찾음' '해방' '구원' 등을 뜻을 갖고 있다.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기자 admin@slotnara.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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